
13일 전남 여수 진남체육관 전광판에 컵대회 경기 연기를 알리는 공지가 떠있다. KOVO 제공
촌극의 연속이다. 한국배구연맹(KOVO)이 컵대회 전면 취소 결정 반나절 만에 조건부 재개하기로 했다. 대회 취소라는 최악의 사태는 일단 피했지만 KOVO의 안일한 업무처리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평판 저하와 비용 부담 등 감당해야 할 후폭풍도 작지 않다. 한달 뒤 개막인 V리그까지 걱정스럽다.
KOVO는 14일 오전 2025 여수·NH농협컵 남자부 대회 조건부 재개를 알렸다. KOVO는 “국제배구연맹(FIVB)로부터 새벽에 대회 조건부 진행을 승인받았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자정 무렵 KOVO는 FIVB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며 대회 취소를 알렸다.
KOVO에 따르면 FIVB측은 ▲KOVO컵은 정규리그와 관련해 어떠한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 ▲KOVO컵을 위해 국제이적동의서(ITC)는 발급되지 않는다 ▲외국 클럽팀이나 외국인 선수는 참가할 수 없다 ▲2025 FIVB 남자부 배구 세계선수권대회에 등록된 선수들은 KOVO컵 대회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대회 진행을 허가했다. 이같은 조건 탓에 초청팀 자격으로 대회에 나설 예정이던 태국팀 나콘라차시마는 경기를 치를 수가 없게 됐다. KOVO는 “기존 예매자의 티켓을 전액 환불하고 예매된 좌석은 유지하기로 했다. 남자부 잔여 경기 모두 무료 관람으로 진행될 예정”이라며 “계속된 번복으로 팬과 관계자분들께 혼란을 일으킨 점을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대회가 마무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FIVB 규정 무시, 일정 강행··· 예견된 참사
컵대회 파행의 직접적인 책임은 국제대회 기간에는 승인 없이 국내 대회를 치를 수 없다는 FIVB 규정을 무시하고 일정을 밀어붙인 KOVO에 있다. FIVB의 올해 일정상 남자배구는 다음달 19일까지가 국제 대회 기간이다. 오는 28일 끝나는 남자배구 세계선수권대회와 대회 후 휴식기간을 포함한 일정이다. FIVB는 선수 보호를 위해 국제 대회 후 폐막 후 3주를 선수 휴식기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 기간 국내 리그는 진행할 수 없다.
FIVB는 이같은 규정을 근거 삼아 KOVO 컵대회 개막 전날인 지난 12일 대회 진행에 제동을 걸었다. 국내 대회를 진행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라며 일정 강행시 ‘페널티’가 주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KOVO는 당혹스럽다고 했다. 이제까지 FIVB가 국제 대회 일정을 엄격하게 따지지도 않았고, 컵대회는 일종의 이벤트 대회인데 FIVB가 정규리그와 같은 잣대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KOVO는 FIVB가 컵대회 개막 전날에야 문제를 제기한 것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KOVO의 해명은 그러나 납득하기 어렵다. KOVO는 관례를 말하지만, 상식적으로 관례보다 규정이 우선이다. FIVB는 올해를 포함해 2028년까지 일정을 2023년 12월 공개했다. 1년 9개월이 지나도록 관례에 기대어 위험 요소는 따지지도 않고 대회 일정을 짰다.
컵대회는 정규리그와 다르다는 주장 역시 ‘임의적’인 판단이 되고 말았다. 컵대회라고 해서 선수들의 체력 소모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선수 보호를 위해 휴식기를 규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컵대회 역시 FIVB가 제동을 걸 여지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구단들은 애 닳는 동안 ‘문제 없다’만 반복한 KOVO
관례를 말하는 KOVO는 FIVB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파비오 아제베두 신임 FIVB가 지난해 11월 부임하면서 다소 느슨했던 기존 일정 규정을 강화하고, 자기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만 하고 있다. KOVO의 추측대로라고 해도 신임 회장 부임 이후 달라진 기조를 면밀히 살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구나 올해 남자 배구 대표팀은 2014년 대회 이후 11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 직접 참가한다. 참가국이 늘면서 혜택을 봤다. FIVB가 한국 국내 대회를 더욱 더 엄격하게 지켜볼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FIVB는 ‘국제대회 기간 국내 리그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국가가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여자부 컵대회의 경우 역시 국제 대회 기간과 겹치지만 FIVB는 아직 특별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KOVO는 컵대회는 리그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정작 그 V리그가 이미 일정 파동을 겪었다. KOVO는 당초 10월18일 예정이던 남자부 V리그 개막전을 3월19일로 연기한다고 지난 11일 밝혔다. 역시 국제대회 기간과 겹친다는 FIVB의 경고에 따른 결정이었다. V리그 개막전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면서도 임박한 컵대회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을지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이벤트 대회니까 괜찮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만 하고 있다가 지금 같은 사달이 난 셈이다. KOVO는 FIVB가 컵대회 개막 직전 갑자기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일정을 그대로 진행해도 될 지 KOVO가 먼저 확인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경고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컵대회가 국제 대회 기간과 겹친다는 걸 인지한 남자 배구 각 구단은 KOVO에 몇 달 전부터 대회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때마다 ‘문제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FIVB로부터 외국인선수 국제이적동의서(ITC)를 발급 받아야 경기에 내보낼 수 있는 각 구단은 진작부터 우려를 내놨지만 정작 운영 주체인 KOVO가 태평했다.
■ V리그는 안녕할까
우여곡절 끝에 컵대회는 재개된다. 그러나 이미 타격이 크다. 대회 스폰서인 여수시와 NH농협이 기대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입장권 수익도 모두 날아갔다. 각 구단은 초유의 사태에 최근 며칠 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초대를 받은 태국팀 나콘라차시마는 1경기도 뛰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 몇몇 구단을 중심으로 시즌 직전 굳이 컵대회를 열어야 하느냐는 시각이 없지 않은데, 이번 파동으로 이런 컵대회 회의론 또한 더 커질 수 있다.
무엇보다 KOVO의 신뢰도가 추락했다. 그러잖아도 V리그가 위기다. 개막 한 달이 남았는데 V리그는 아직 타이틀 스폰서를 확정하지 못했다. 8년간 V리그 스폰서를 맡았던 도드람과 계약이 지난 시즌으로 끝났다. KOVO는 새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그간 4~5개 기업과 협상을 벌였지만 계약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지난 4월에는 이례적으로 새 스폰서 공개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스폰서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비용 대비 충분한 효과를 입증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설득의 주체가 돼야 할 KOVO를 향한 믿음이 컵대회 파동으로 땅에 떨어졌다.
심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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