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과 육성, 두 마리 토끼 잡는 LG의 비밀
하이커뮤니티매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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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5 신한 쏠뱅크 KBO리그 LG 트윈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3-2로 승리한 LG 염경엽 감독(오른쪽)이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몇 년 전부터 야구계에는 리빌딩이라는 유행이 번졌다. 과거에도 가을야구 진출이 무산된 팀들이 대외용 포장지로 '리빌딩'을 앞세우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최근에는 아예 시즌 전부터 성적을 포기하는 메이저리그식 리빌딩을 시도하는 팀들이 나왔다. 한화 이글스는 '실패할 자유'를 외치면서 2020년부터 리빌딩에 돌입했고, 키움 히어로즈도 2023년을 기점으로 리빌딩 모드를 가동했다.
그러나 정작 이런 모델로 성공을 거둔 사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올시즌 한화 이글스가 정규시즌 2위로 2018년 이후 7년 만의 가을야구를 앞두고 있지만, 리빌딩 성과라기보단 코디 폰세라는 외계인 에이스의 활약이 차지하는 지분이 커 보인다. 키움 히어로즈도 올해까지 3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그치고 있다. 최근 키움이 지명하고 1군에서 무한정 기회를 준 선수 중에 확실한 주전이나 스타로 자리 잡은 선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야구는 게임이 아니다. 나이 많은 선수를 치우고 젊은 선수들로 자리를 채워서 기회를 주면 자연히 성장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 1군에서 뛸 준비가 안 된 선수들이 1군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일부는 1군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고 성장하기를 멈추는 경우도 있다. 계획에 없던 돌발 악재와 변수도 생긴다. 키움만 해도 내년 에이스 역할을 기대한 안우진의 어깨 부상, 마무리투수로 기껏 키워놓은 주승우의 수술 같은 돌발 악재로 내년 시즌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경기도 이천의 LG 챔피언스 파크. photo LG 트윈스
LG의 격세지감
오히려 선수 육성의 성공사례는 단독 선두를 달리는 강팀 LG 트윈스에서 나오고 있다. LG는 지난 9월 6일 가을야구 진출을 확정하면서 2019년부터 시작한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는 10개 구단 체제 이후 최다 기록으로, 두산이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간 7시즌 연속 진출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록이다. 이미 2023년 우승을 차지한 LG는 올해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강팀이 성적을 내면서 동시에 유망주 육성까지 해내고 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말했던 "올 시즌엔 육성과 성적을 동시에 내야 한다"는 공언을 실천하고 있는 LG다.
지금은 리그 최강팀이 된 LG도 한때 우울한 시절이 있었다. 1994년 신바람 야구로 우승한 이후 왕조를 건설할 줄 알았지만 LG 시대는 예상보다 일찍 끝나버렸다. 이후 우승 없이 28년을 보냈다. 가을야구도 삼성을 상대로 한국시리즈에서 패한 2002년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하위권을 전전하며 긴 암흑기를 보냈다.
암흑기 시절 LG는 선수를 지지리도 못 키우는 팀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같은 서울 연고의 두산 베어스가 '화수분 야구'로 성공을 거두고 키움 히어로즈가 강정호·김하성·이정후 등 대박을 터뜨리는 동안 LG 트윈스가 지명해서 스타로 성장한 선수는 2009년 입단한 오지환이 사실상 유일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이 넘쳐나는 서울 팜을 삼등분하면서도 실패가 연속되다 보니 더욱 부각됐다.
좋은 선수를 뽑아놓고 키우지 못해서 다른 팀에 좋은 일을 시켜주는 경우도 많았다. KIA로 이적한 뒤 MVP가 된 김상현, 넥센으로 이적해서 한국야구 최고의 거포가 된 박병호, KT로 옮긴 뒤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박경수, 두산으로 이적해 리그 정상급 거포가 된 양석환 등 다른 팀에 가서 잠재력을 터뜨리는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경기도 이천의 LG 챔피언스 파크. photo LG 트윈스
육성 실패 대표사례 박병호
암흑기 시절 LG 현장은 '스카우트가 좋은 선수를 못 뽑는다'고 불평했다. 반대로 스카우트 쪽에서는 '코치들이 선수를 못 키운다'고 푸념하며 서로 손가락질했다. 박병호의 LG 시절 한 팀장급 인사는 "박병호의 타격폼으로는 몸쪽 공 대응이 전혀 안 된다. 박병호는 절대 1군에서 성공 못 한다"면서 트레이드를 주장했다. 이 인사는 야구를 해본 적 없는 비선수 출신이었다. 박병호는 이후 넥센으로 건너가 리그를 지배하는 타자가 됐다. 암흑기 LG가 스카우트한 선수 중에는 지명 동기가 의심스러운 선수가 적지 않았다. 선수를 지도하는 현장 지도자들의 역량에도 모자람이 있었다. 침체된 구단 분위기와 선수단 문화도 좋은 선수를 길러내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구단도 팬들도 조급했다.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참고 기다릴 줄을 몰랐다.
야구는 드라마가 아닌 다큐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처럼 단 한 번의 겨울 안에 꼴찌 팀이 극적으로 우승팀이 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LG도 숱한 시행착오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조금 전진하는가 싶다가 퇴보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출발점은 2014년 이천 챔피언스파크 개장이었다. LG는 기존 구리 2군 구장을 떠나면서 경기도 이천에 무려 1200억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돔 연습장과, 2면 짜리 야구장을 건설했다. 내야 인조잔디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도쿄 돔에서 사용하는 잔디와 같은 제품으로 설치했다. 구장 곳곳에 겨울에도 훈련할 수 있게 온열판을 설치하고, 태양광과 가장 흡사한 PLS조명을 한국의 야구장 중 최초로 설치했다. 식당, 웨이트장, 숙소 등 시설부터 식단, 심지어 커피 원두까지도 최상급이란 평가가 나올 만큼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천 시대'가 열리면서, 신인 선수와 유망주를 '제대로' 키워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오랫동안 LG에 몸담으며 한 파트에서 오래 일해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변화에 속도가 붙었다. 다른 구단에서 오래 일한 야구 관계자는 "지금 LG가 강팀이 된 원동력은 '사람'에 있다"면서 "특히 자기 전문분야에서 오래 일하고 경험을 쌓은 팀장급들의 역할이 크다. 스카우트 파트 백성진 팀장과 데이터 분석 파트의 노석기 팀장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백성진 팀장은 1998년 현대 유니콘스 스카우트로 시작해 올해까지 27년간 스카우트 외길을 걸었다. 2017년 후반부터 스카우트 팀장을 맡아 이끌어오고 있다. LG 스카우트 파트 다른 직원들도 오랫동안 스카우트로 일하며 노하우가 풍부한 인력들이다. 백 팀장이 팀장에 임명된 뒤 LG 스카우트는 성공의 연속이었다. 2019년 신인드래프트에선 이정용(1차 지명), 정우영(2차 2R), 문보경(2차 3R), 구본혁(2차 6R), 이지강(2차 9R) 등이 1군 주전으로 올라섰다. 2020년 드래프트에서도 이민호(1차 지명), 김윤식(2차 1R), 유영찬(2차 5R)이 나왔고, 2021년 송승기(2차 9R), 2022년 이주헌(2차 3R), 최원영(2차 6R), 2023년 박명근(2차 3R)이 등장했다. 지난해 열린 2025년 드래프트에선 김영우(1R), 박관우(5R)가 1군 주력으로 올라섰고, 12명 가운데 5명이 올시즌 입단 첫해부터 바로 1군에 올라왔다. LG가 작년 드래프트에서 10팀 중에 10순위 지명권을 사용한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경기도 이천의 LG 챔피언스 파크. photo LG 트윈스
핵심 선수 대부분이 육성의 결과
현재 LG 주전 멤버 중에는 자체 생산 선수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내야에서 오스틴 딘을 제외한 2루수(신민재), 3루수(문보경), 유격수(오지환)가 모두 LG에서 지명해서 키워낸 선수다. 외야에서도 문성주와 현재 부상으로 빠져 있는 홍창기가 LG 출신 선수다. 투수진에서는 국내 선발 3인(임찬규, 손주영, 송승기)이 전부 LG 자체 생산 선수다. 불펜에서도 유영찬, 김영우, 이정용, 박명근이 LG가 뽑고 LG가 만든 선수다. 주전은 아니지만 구본혁, 최원영, 박관우, 이주헌 등도 차세대 주력 선수로 기대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염경엽 감독은 "하위권 팀 중에 육성한다고 해서 성공한 팀이 누가 있나"라고 반문한다. "왜 하위 팀들이 육성을 못하고 실패하는지 누구보다 분석을 많이 했다"는 염 감독은 "계획을 갖고 성장을 시켜야 빨리 육성된다. 성공 체험을 하는 게 무엇보다 확률 높은 육성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언뜻 생각하면 성적을 포기한 하위권 팀이 젊은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면서 육성하기 좋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팀 성적이 좋고 전력이 좋은 팀에서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온다. 최근 3년간 리빌딩만 하고 있는 키움의 경우에도 김하성, 이정후, 김혜성, 안우진 등 좋은 선수가 나온 건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강팀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야구 잘하는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치열하게 1군 자리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좋은 선수가 나오는 법이다.
부자가 부자라는 이유로 더 부자가 되는 '마태효과'는 야구에도 적용된다. 야구에서 강팀은 강팀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더 강해진다. 강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선수 육성이 더욱 수월해지는 면이 있다. LG가 올해 필승조로 길러낸 김영우가 좋은 예다. 만약 김영우가 다른 팀, 특히 투수진이 약한 팀 소속이었다면 바로 마무리로 기용되거나 위기 상황에 투입하면서 힘든 상황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려움을 잘 이겨내서 큰 투수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경험하면서 좌절하고 성장이 정체됐을 가능성도 있다. 투수력이 풍부한 LG는 김영우에게 처음부터 필승조를 맡기지 않고 부담이 적은 상황에 기용하면서 경험을 쌓을 시간을 줬다. 그러다 이따금 필승조 투입이 어려운 경기에서 타이트한 상황도 막아보고 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치열한 경쟁과 모범적 고참
LG의 현재 주전들은 하나같이 이런 치열한 과정을 거쳐 1군 주전으로 올라온 선수들이다. 오지환은 LG 암흑기부터 우승까지 고락을 모두 경험한 상징적 선수다. 국내 에이스 임찬규도 입단 이후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겪고 이겨내면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거저 얻은 자리에 무임승차한 선수가 아니라 2군에서부터 치열한 경쟁을 거쳐서 1군 한 자리를 얻고, 1군에 올라온 뒤에도 주어진 기회에 자기 가치를 증명해서 기회를 늘려간 선수들이다. 이렇게 해서 확실한 주전이 만들어진 자리엔, 키워볼 만한 다음 주자를 준비해서 경쟁 구도를 만든다. 주전 선수도 완전히 안심하기 어렵고 후보 선수와 유망주들은 동기가 부여된다. 박해민이 있는 자리에는 최원영을 미리부터 준비시키고, 박동원이 있는 포수 포지션에는 이주헌을 발굴해서 준비시킨다.
만약 박해민, 박동원이 팀을 떠나거나 기량이 감퇴하면 오랜 빌드업을 거쳐 준비한 선수들에게 기회를 준다. 내부 자원으로 메울 수 없는 자리는 적절한 외부 영입으로 커버한다. 팀의 문화도 무시할 수 없다. 야수진에는 김현수와 오지환, 투수진에는 김진성과 같은 모범적인 고참 리더들이 앞장서서 건강한 팀 문화를 만들어가니 젊은 선수들이 안이한 플레이나 느슨한 행동을 하기 어렵다. 고참들이 가장 먼저 야구장에 나와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팀에서 젊은 선수들도 자연히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LG의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 김현수의 FA 합류(2018년) 이후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염경엽 감독은 "그나마 육성이 잘된 게 우리 팀"이라며 "차근차근 하나씩 키워서 채운 게 그나마 우리"라고 흐뭇하게 말했다.
다른 팀들 입장에서 무서운 건 LG 트윈스의 시대가 올해 이후에도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팀 성적도 1위지만 그와 함께 차세대 팀을 이끌어갈 선수 육성도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리그에서 선수 육성을 가장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팀이 LG다. 올해까지 7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로 끝나지 않고 더 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994년 신바람 우승 이후 짧게 끝났던 1990년대의 전성시대와 달리, 이번에는 오래 이어질 것 같다. 성적을 내면서 동시에 미래까지 준비하는 LG의 방식이 야구계에 올바른 육성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리빌딩을 외치는 KBO리그 구단들이 참고해야 할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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