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두번이나 제명 당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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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두번이나 제명 당한 사연

하이커뮤니티매니져 0 3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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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③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은 적어도 바둑세계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대체로 형보다는 동생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예로 들면, 형 김수영보다 동생 김수장이, 형 안형준보다 동생 안성준의 성적이 돋보인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형제기사로 꼽히는 형제기사 이상훈보다 동생 이세돌의 업적이 훨씬 뛰어나다.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형 조상연과 동생 조치훈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들 동생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형 없이 아우 없다’란 사실을 대면하게 된다. 일찍이 그런 형이 없었다면 이런 아우도 없었을 것이란 사실. 바둑영웅 조치훈 九단을 키운 건 8할이 형 조상연의 헌신 덕분이었다. 형 조상연 七단으로부터 조치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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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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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번이나 제명당한 사연







한번 제명당한 뒤 복권(復權)됐다가 다시 제명 처분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과정도 없이 한 사람을 두 번 중복으로 제명시키는 행위는 성립되지 않는다. 필자는 조상연 七단이 한국기원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제명당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한국에서 [사단법인 조치훈후원회]를 이끌면서 1986년 월간 바둑잡지인 [바둑세계]를 창간(7월호)한 것 때문에 제명당한 줄로만 알았다.






그 시절 한국기원 운영을 월간『바둑』판매수입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을 때라 경쟁지 출현이 달가울 리 없었다. 세월이 지나 지금 시각으로 본다면 이해가 잘 안가는 처결같아 보이지만 그때는 해당행위와 같아서 한국의 동료기사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괘씸죄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 그런데 그 이전 도일한 직후에도 괘씸죄로 한번 제명당한 바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일본에 간 후 전해들었어요. 한국기원에서 제명시켰다고. 왜? 일본으로 갔다고 제명시킬 리 없을 테고. 나중 알고 보니 내가 한국기원 四단인데 五단입네 거짓말을 하고 다녀 한국기사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죄과로. 단위를 부풀린 적도 없었지만 처음 일본말을 할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자들이 통역 과정에서 그렇게 썼을 순 있어요. 누군가 한국기원에 얘기해줬나 봐요. 그렇다면 당사자에게 직접 연락해 전후사정을 들어보고 통고 를 하더라도 해야지. 정식으로 통보 받은 일도 없고요.






왜 제명을 시키지? 그때는 억울했어요. 하지만 지난날을 돌아보니, 미워서…, 내가 하도 미운 짓을 많이 해서 그랬을 거라고. 부덕의 소치죠. 내가 내 젊은날을 평가해 보아도 솔직히‘싸가지’가 좀 없긴 했어요.






지방신문사서 조상연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10번기를 두면서 나이 많은 선배들이 이 조그마한 놈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을 것이고, 실은 대국료를 더 받아내기 위해 승패를 조율해 가며 둔 것도 사실이고. 가령 7번기를 둘 경우 4승을 내리 거두면 승부가 끝나버리잖아. 4연승이면 그걸로 끝이고 그러면 네 판 대국료밖에 못 받게 되니까.






나중 이런 사실을 주최측에서도 인지했고 나도 강변했지. 우승상금을 걸든지 아니면 판판이 대국료를 주더라도 최종승자 보너스를 거는 게 이치에도 맞고 더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랬더니 일리 있다며 받아들이기도 했어.






숙질간 소원했던 관계






조남철 九단과는 삼촌조카 사이기는 해도 승부로 만나면 그럴 수 없어요. 젊은날 나로선 자신만만한 패기였겠지만 선배들이 보기엔 기고만장이었을 테지. 삼촌과 도전기를 벌일 땐 대국료에 불만이 컸어. 왜 도전자와 타이틀 보유자 간 대국료에 차등을 두는 것인지, 똑같이 마주앉아 한판을 두는데 저단자와 고단자 간 격차를 정해놓은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여겼어. 후일 일본에 가서야 수긍하게 됐지만 그 전까지는 그런 식으로 튀었고, 그랬으니 오죽 미웠겠어.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반기고 싶었겠냐고.






월간지 [바둑세계]를 만든 것도 실은 전두환 정권 실세들의 적극 의사랄까, 조력이랄까 이런 것과도 관련이 있었어요. 일일이 실명을 밝히긴 그렇지만, 치훈이가 일본바둑을 제패하면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이자 정권 실세로부터 여러 가지 후원 의사가 들어왔고, 그 중 하나가 조치훈후원회에서 당시 발간하던 회보를 정기등록물인 월간지로 발행하자는 제안이었어요.






그거 하면 난 한국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잡지 출판으로는 돈도 안되는 일인데 한국기원의 반감만 잔뜩 살게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요. 그랬더니 문공부 고위관계자가 ‘아니, 바둑보급을 위해 잡지가 여러 종 있으면 더 좋은 거 아냐? 왜 반대를 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잡지 만드는데 그걸 못하게 해?’ 이러면서 다 커버해 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하니 여하간 우여곡절 끝에 창간하게 됐지. 예상했던 대로 그걸로 난 한번 더 제명당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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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바둑세계」86년 창간호(7월호)





첫 번째 제명당했을 때나 두 번째 제명당했을 때나 한국바둑은 누가 뭐래도 삼촌 조남철 九단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잖아. 그런 점에서 조카의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삼촌으로서 적잖이 난감했을 거야. 그렇긴 하지만 또 반대로 삼촌의 의중과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조카 입장에서는 섭섭하지 않았을까? 숙질간을 떠나 승부세계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나 인간세계나 절대권력에 도전하는 존재는 달갑지 않지요.






돌이켜보면 해방과 전쟁 난리통을 겪으며 그 힘들고 어렵던 시절, 제아무리 한국바둑의 일인자라 한들 자기 자식들에게 변변히 먹일 밥도 없는데 바둑 두는 조카녀석이라 해서 자상하게 신경 써 줄 여유가 있었겠나요? 과거엔 섭섭하고 속상하고 알력도 있었고 원망도 했지만, 그 탓에 오랜 세월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전 작은아버지댁으로 찾아가 오해도 풀고 서로 화해를 했습니다.”






조상연 七단의 제명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있다. 다른 기사의 증언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소장파 기사였던 K 九단은 이렇게 기억했다.






“조 사범님이 두 번 제명당했다는 얘기는 이번에 처음 듣네요. 만약 그랬다면 첫 번째 제명은 복권됐다는 얘기인데, 왜냐면 제가 활동할 때엔 일본을 오가며 한국기원에도 종종 들렀을 뿐 아니라 조언 같은 걸 하는 모습도 봤으니까요.






문제는 두 번째 제명일 텐데, 86년 [월간 바둑 세계] 창간이 ‘제명 여론’을 격발시킨 요인이긴 했어요. 이게 우리에게 알려진 대외명분이었지만 실은 그 1년 전 85년 1월 서울서 열린 일본 기성전 도전1국 직후부터 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었거든요.






당시 조남철 선생이 고급 바둑판 하나를 들고 조카 조치훈 기성이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저녁에 찾아가 휘호를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당했다고 그래요. 형이자 매니저 격인 조상연 사범이 중간에서 거부의사를 밝혔고,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숙부에게 거친 언사까지 퍼부었다는 전언이 퍼지면서 묵과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지요. 그러다 월간지 창간 문제로 들끓었고 그러고서도 제명하기까지 1년 이상 끌었던 거 같아요. 조치훈 형제를 비호하던 정권 실세들의 눈치를 봤던 거죠.”






이에 조상연 七단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건 일본바둑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기성전 도전기는 일본기원이 진행은 하지만 주최사인 요미우리 신문사의 허락 없이는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어요. 치훈이는 기성(棋聖)이고 주최주관사의 공적인 일정에 따르는 겁니다.






삼촌이 예고에 없던 바둑판 휘호를 부탁하러 오셨다며 급히 연락이 왔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요. 알다시피 도전기를 치를 때는 생각 이상 민감할 시기잖아. 그래서 일본기원과 주최사의 결정에 따르라고 했지. 다른 사람도 아닌 삼촌의 부탁인데 그냥 쓰윽 해주면 될 것을 애초 해주기 싫어 그런 것 아니냐는, 한국적 정서로는 문전박대로 보였겠지만, 형이래도 이래라 저래라 할 위치에 있지 않아요.”







5. 동생을 위해 역술, 최면, 아동심리학까지 공부한 형…마지막 꿈은 후학양성







조치훈이 바둑을 처음 접한 건 네 살무렵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바둑을 즐긴 덕분에 형들처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1년 만에 아마5단 실력까지 올라갔고 인근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






여섯 살에 일본으로 건너올 때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기타니 문하생들의 총 합산 단위가 100단을 돌파하는 기념식 지도대국에서 이기면서 ‘10세 입단 기록’을 달성할 아이로 거론됐다. 그러나 좋았던 건, 거기까지였다. 기타니도장에서 내제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현실을 깨닫게 됐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어느 날 갑자기 툭 던져졌다. 그것도 고작 여섯 살짜리 어린애다. 한국에서야 ‘우쭈쭈’ 치켜세울 법한 바둑실력이었을지 모르나 기타니도장에서는 연구생 10급으로 시작해야 했다. 거긴 일본에서 말하는 ‘도깨비 소굴’이었다. 이미 정상급 프로실력을 가진 사형(師兄)들이 즐비했다.






“어디 우리 치훈이 살짝 맛 좀 보여줄까?”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선배와는 9점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도장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됐고 혹독한 현실에서 도피하고만 싶었다. 등교하는 척하며 도장과 학교 사이에 있던 형의 아파트로 가 혼자 지내는 은둔생활에 빠졌다. 낮에는 형 상연이 없기 때문에 동굴로서는 최적의 장소였다. 사실 여기 말고는 어린아이에게 딱히 갈 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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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니도장의 수업 한때. 오른쪽 줄 뒤편 기타니 부부와 전면 끝에 도장막내 조치훈, 기타니 선생의 3녀 레이코(六단, 후일 고바야 시 고이치와 결혼)가 보인다.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음을 아실 테다. 조치훈을 비롯하여 고바야시 고이치, 다케미야, 이시다, 가토 등이 보인다. 누군지 알아보신다면 대단한 바둑애호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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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살 조치훈이 기타니도장에 입문한 것이 1962년 8월. 이때 사형(師兄)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는 기타니도장의 맏형 그룹으로 가장 촉망받는 수제자였다. 57년 아홉 살 때 기타니 문하에 들어와 63년 8월 입단한 그는 훗날 71년 제26기 본인방전에서 린하이펑(林海峰) 9단을 꺾고 최연소 본인방(22세)에 올랐을 뿐 아니라 74년 제13기 명인전에서 린하이펑을 꺾고 사카다, 린하이펑에 이어 세 번째로 명인과 본인방을 동시 보유하게 되는 사람이다. 꼬마 조치훈에게는 하늘 같은 선배였다.




사진은 1963년 1월 6일, 한일 양국의 차세대 유망주인 일본의 이시다(당시 원생)와 한국의 조훈현 初단이 각자 국가에서 전화대국으로 대결을 펼친 바 있는데, 스승 기타니 九단이 도장 막내인 조치훈을 데리고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모습. 그 옆엔 언제나 그렇듯 형 상연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다. 조치훈은 내제자였고 조상연은 외제자로 기타니 九단을 사사(師事)했다.





한국말 트라우마






바둑판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두는’ 치열한 승부사이지만 반외에서의 조치훈 九단은 코미디언 못지않게 엄청 재미있고 쾌활한 사람이다. 공개해설장에서나 사석에서나 일본말은 청산유수다. 글도 잘 쓴다. 팬들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어서 2012년 초부터 일본기원에서 발행하는 바둑 주간지에서 <고민해결 천국>이라는 칼럼을 10년 간 500회나 연재했다.






“만화 같은 코미디를 워낙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유머만큼은 잃지 않으려고 항상 신경 썼다”는 본인의 말대로 인생상담까지 망라한 코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4권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런 그도 우리말 구사하는 데에는 콤플렉스가 있다. 어릴 적부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조훈현 九단은 조치훈보다 세 살 더 많다. 일본 유학도 조치훈보다 일년 늦은 63년 열 살에 갔는데도 72년 9년 만에 귀국했을 때는 우리말을 거의 잊다시피 한 상태여서 다시 배워야했다. 네 살이나 더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난 조치훈이 우리말을 완전히 잊었다고 한들 비난할 일이 아니다. 다 알아듣고 더듬거리기는 하나 우리말로 천천히 대답해 내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한국인이기를 요구한다. 특히 속사포마냥 질문하는 기자들과 대할 때는 트라우마가 극에 달한다. 한국인이 한국말도 제대로 못한다는 둥, 아버지 조남석 씨 장례식장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는 둥, 80년 명인을 따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으러 왔을 때 전방 땅굴을 견학하면서도 방위성금 한 푼 내지 않고 돌아갔다는 둥, 이런저런 구설에 상처를 받았다. 한국 언론과의 만남이 편할 수는 없었다. 우리말 트라우마를 겪는 동생을 지켜봐야 하는 형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이유가 있어요. 여섯 살 때 갔죠? 일본사람한테 한국말로 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거든. 이거 안 되는구나 싶어 얼른 말을 중간에 딱 끊어.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말을 더듬네. 말을 더듬는 버릇이 드니 그냥 미치고 환장해요.






그걸 좀 고쳐줘야겠다, 그런데 고치는데 돈이 많이 들어. 알아보니 최면 기술로 고친다는 말이 있어. 그럼 내가 배워야 되겠다. 역학도 공부한 적이 있고요. 내가 점은 좀 보지. 치훈이 운세도 봤고. 그리고 내가 대학교 갔을 때 학과도 아동심리학을 했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이른 나이였던 것 같아. 부모와 정을 쌓을 시간도 없이 떨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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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탓에 우리말에 서툴러 그렇지(완전히 잊지 않은 것만도 용한데) 일단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청산유수다. 코미디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좌중을 팡팡 터뜨리는 입담을 과시하곤 한다. 그의 코믹한 바둑해설은 팬들에게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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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소 전문가 조치훈

2016년 1월 ‘한국바둑의 전설’ 4인이 이벤트 대결로 팬들을 즐겁게했다. ‘2016 전자랜드 프라이스킹배 한국바둑의 전설’ 개막식에서 언제나 그렇듯 조치훈 九단은 특유의 입담을 과시했다.


“바둑은 몰라도 골프라면 여기 있는 사람 누구라도 이길 자신 있다. 그런데 이창호 九단만 예외다. 골프를 하질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길 분야가 없다." (좌중 폭소)





오히려 고국의 구설에 상처받았다






조치훈 九단도 부모품을 너무 일찍 떨어진 것에 대해선 종종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어린 스미레(仲邑董)가 처음 일본기원 관서총본부에서 도쿄 본원으로 이적했을 때 “조금 더 관서에서 실력을 닦은 뒤 강한 기사들이 많은 도쿄에 와도 늦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떠올리고 걱정한 것이다.






1999년 1월 13일 아버지 조남석 씨가 돌아가셨을 때 조치훈 九단은 프랑스 파리에서 제23기 기성전 도전7번기 1국을 숙적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과 치르고 있었다. 아들의 대국에 영향을 줄까봐 유족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뒤늦게 빈소를 찾은 조치훈 九단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부자지간의 정이 있을 리 없는데 사람들은 곡(哭)을 기대했나 보다. 조치훈에게는 형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동생의 뒷바라지에 전력하기 위해 나이 마흔이 넘어 서야 만혼(晩婚)한 형이다.






“왜 울지 않았느냐고 나중에 물으니, 치훈이가 ‘차라리 형이 세상을 떠났다면 함께한 추억 때문에 많이 슬펐을 텐데…, 아버지와는 그런 기억이 거의 없어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때 마음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조치훈 九단은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형이나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정말 없다. 오히려, 자기 앞가림만 하기에도 벅찼을 형이 나를 일본으로 데려오고 자신을 희생하며 뒷바라지해 준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90%는 감사한 마음이더라도 남은 10%쯤에서 ‘조금만 더 늦게 일본에 왔더라면 훨씬 더 여유롭고 밝은 바둑을 둘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계속 남아있다.”






어느 순간 한국에 한때 가졌던 섭섭한 감정도 봄눈 녹듯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고국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됐고, 2017년부터 시니어리그에 3년 연속 부산 KH에너지팀 선수로 참가하면서 한국을 더, 정말 좋아하게 됐다고 말한다.






2015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와 1남1녀의 아이들은 모두 일본 국적이다. 자신도 귀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고 일본사회에서 살려면 귀화하는 쪽이 자연스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치훈 九단은 시니어리그에 참여할 때 “마지막에 죽을 때 한국에서 죽고 싶은 생각은 한다. 그렇다고 한국에 돌아와서 살 생각은 없다. 일본에 있으니 한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반드시 이겨야 일본사회에서 살 수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둘 수밖에 없었던 그다. 비행기 탈 생각에 신났던 여섯 살배기 아이는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길이란 걸 알지 못했다. 자신은 명예와 부를 안겨준 일본에 대한 감사한 마음 때문에, 아이들이 살고 있는 일본이기에 죽어서 거기에 묻힐 것이지만 뼈 한 조각은 고향 부산 앞바다에 뿌려주면 고맙겠다”고 말하는 그, 바둑공부를 할 때면 늘 한국 드라마와 트로트를 틀어놓고 한다고 하는 그다.






바둑, 그 숙명의 레일. 나는 바둑이 좋아 이 세계에 뛰어든 것은 아닙니다.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숙명의 레일 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선택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둑은 나의 숙명-숙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 월간「바둑세계」연재,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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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의 뒷모습.

혼신을 다한 승부사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처절한 그 모습에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1994년 제49기 본인방전 도전6국 종국의 풍경은 이러했다. 도전자 가타오카 九단을 맞아 마지막 한방울의 영혼까지 불사르고 휘적휘적 퇴청하는 조치훈.본인방. 대국중 무아지경에 풀어헤친 허리춤을 대충 추스르며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대국장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여한'이란 단어를 찾기란 어렵다. 한판의 바둑에 목숨을 거는 자, 조치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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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둔다.

이 이상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바둑사상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보기 힘들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 교통사고로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고도 바둑판 앞에 앉은 이. “기권이란 없다. 기권을 하느니 차라리 바둑판 앞에서 죽겠다. 아직 내게는 머리와 두 눈, 오른팔은 멀쩡하다. 이것은 바둑을 두라는 하느님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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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76회우승기록



조치훈은 ‘기록의 사나이’로 불린다. 일본바둑사상 최초 공식전 1600승 달성(2023년 12월 25일), 2002년에 통산 타이틀 65회 획득을 기록하며 역대 1위에 올랐고, 2023년 4월 데이케이배 레전드전 우승으로 76회를 달성했다. 이 기록은 2024년 12월 6일 이야마 유타 九단에 의해서 깨졌지만(제72기 일본 왕좌전 도전5번기에서 시바노 도라마루 九단에게 3:1로 이기면서 77회 우승) 일본바둑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다.


사진은 2023년 4월 8일 제2회 데이케이배 레전드전 결승에서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을 꺾고 76회 우승탑을 쌓는 순간.





형 조상연의 마지막 꿈






숙명처럼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린 게 단지 동생뿐이었을까. 형 조상연의 인생 또한 그러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동생의 인생은 무대 앞이었고 형은 장막 뒤였다는 것. 어두운 밤하늘에서야 빛나는 별처럼, 장막 뒤의 인생을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기나긴 여정의 노고를 끝낸 것처럼 보이는 그런 ‘위대한’ 형에게도 마지막 꿈이 아직 남아있다.






“일본 후쿠오카에 노후를 대비해 사둔 땅이 2000평 정도 있어요. 딸 부부가 2년 정도 후에 은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가 되면 그곳에다 건물을 한 채 짓고 1층은 식당을 운영하고 2층에서는 바둑지망생들을 가르쳐 보고 싶습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물론 대만 등 각국의 바둑유망주들을 받아 키워보고 싶어요.






일단 수업료는 안 받을 생각이에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올 수 있도록 일단은 무료로 먹이고(그래서 식당운영은 필수) 재우며 키워 나중 프로가 되면, 그 친구들이 성공하면 대국료나 상금에서 10% 정도만 기부해 후학들을 계속 양성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바둑도장 시스템을 시도해 보고 싶어요.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꿈입니다.”







이번 편에서는 형 조상연이 한국기원에서 두 번이나 제명당한 사연과 동생 조치훈이 겪은 일본 생활의 고충, 그리고 그런 동생을 위해 역술, 최면, 아동심리학까지 공부하며 헌신한 형의 지극한 노력을 되짚어보았다. 다음 마지막 편에서는 ‘지고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조치훈의 비정한 승부 철학, 교통사고 후 ‘휠체어 대국’을 펼치며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처음으로 존경심을 품게 된 계기, 그리고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기 위해 결승전을 기권했던 애틋한 사연까지, 인간 조치훈의 숨겨진 이야기가 펼쳐진다.






[4편, 에필로그(Epilogue) 편으로 계속]








<4편, 에필로그(Epilogue) 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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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별 팀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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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경기 승점
1 리버풀 19 12 6 1 42
2 아스널 18 12 4 2 40
3 애스턴 빌라 19 12 3 4 39
4 토트넘 18 11 3 4 36
5 맨시티 17 10 4 3 34
6 맨유 19 10 1 8 31
7 웨스트햄 18 9 3 6 30
8 뉴캐슬 19 9 2 8 29
9 브라이튼 18 7 6 5 27
10 본머스 18 7 4 7 25
11 첼시 18 6 4 8 22
12 울버햄튼 18 6 4 8 22
13 풀럼 19 6 3 10 21
14 브렌트포드 17 5 4 8 19
15 크리스탈 팰리스 18 4 6 8 18
16 노팅엄 포레스트 19 4 5 10 17
17 에버턴 18 8 2 8 16
18 루턴 18 4 3 11 15
19 번리 19 3 2 14 11
20 셰필드 19 2 3 1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