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②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은 적어도 바둑세계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대체로 형보다는 동생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예로 들면, 형 김수영보다 동생 김수장이, 형 안형준보다 동생 안성준의 성적이 돋보인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형제기사로 꼽히는 형제기사 이상훈보다 동생 이세돌의 업적이 훨씬 뛰어나다.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형 조상연과 동생 조치훈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들 동생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형 없이 아우 없다’란 사실을 대면하게 된다. 일찍이 그런 형이 없었다면 이런 아우도 없었을 것이란 사실. 바둑영웅 조치훈 九단을 키운 건 8할이 형 조상연의 헌신 덕분이었다. 형 조상연 七단으로부터 조치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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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홀연한 도일과 여섯 살 조치훈을 일본으로 데려간 이야기
만약 형 상연이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동생 치훈의 바둑드라마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원조’ 소년기사로 등장한 후 스물한두 살 청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전도유망한 스타 기사로 인기를 누리던 그가 일본으로 훌쩍 떠난 건 느닷없는 일이었다. 조남철 선생의 회고록(78년 월간『바둑』12월호)을 보면 삼촌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결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필자를 찾아온 상연 군은 “삼촌! 저 일본에 가게 됐습니다” 한다. 한밤에 홍두깨 격이어서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너 참 용하구나. 어떻게 가게 됐니?” 하니 “네, 유력인사가 모든 것을 맡아주셨습니다” 한다. 숙질간이지만 바둑밖에 모르는 필자와는 달리 상연 군은 인덕도 많다고 생각했다. 일본 유학을 간다기에 기타니 선생께 소개장이라도 부탁하러 왔는가? 했는데 그것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럼 공부나 열심히 해 대성해달라”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후 소식을 듣자니 상연 군은 대판(大阪, 오사카)에 있는 관서기원에서 五단을 인허해 준다면서 그 곳으로 간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그와 때를 같이해 기타니 선생으로부터 느닷없이 호령장이 날라왔다. 내용인 즉, “자네 조카가 바둑을 공부하러 일본에 왔다는데 어째서 나에게 보내지 않고 관서기원으로 보내느냐, 지금 당장 내 앞으로 보내도록 하라”는 추상같은 호령이었다. (중략) 어쩔 수 없이 (형님 조남석을 통해) 상연이의 주소를 수소문해 기타니 선생 도장으로 입문할 것을 종용하는 편지를 띄웠다.
얼마 후 상연 군의 답장에 따르면 “일본에 와 보니 삼촌의 위대함을 실감했습니다”고 추어세워 놓고서 “五단을 주겠다는 관서기원 소속기사도 사양하고 삼촌 말씀대로 기타니도장에 입문했습니다”는 내용이었다.
기타니 선생은 제자 욕심이 남달리 강한 분이어서 상연 군의 입문을 기뻐했을 것이 뻔하며 시험바둑을 통해 二단 자격을 받도록 무한히 애쓰신 분이다. - 1978년 월간『바둑』12월호, <조남철 회고록>
▲ 조상연 七단이 청년시절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활약하던 때 동료 기사들과 한 사찰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앞에서부터 청년시절의 김인, 조상연, 최창원, 윤기현, 김재구 프로가 보인다.
- 남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홀연한 일본행인데, 어떻게 된 건가요? 혹시 그 보름 전에 먼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배 김인의 결행에 자극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요?
“바둑신동으로 알려지다 보니까 그때 심계원(審計院·오늘날 감사원의 전신) 원장인 최하영 씨를 알게 됐어. 조선총독부 농림과장을 했어요. 대단한 거지. 초대 원장인 장경근 씨도 내가 잘 알고 최하영 씨도 잘 알아. 다 한국기원 이사장을 한 바둑애호가들이야. 그러니까 심계원의 후원을 받은 셈인데, 어느 날 최하영 이 분이 날 부르더니 자기가 뒤를 봐줄 테니까 부산에 있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래. 그러더니 기왕 봐줄 것이면 경기고를 넣어줄 것이지 내가 부산상고에 재학중이니까 경기상고에다 넣어놨네?
청운동에 있는 경기상고에 가긴 갔는데 바둑 두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학교 갈 시간이 없어. 한달에 한두 번이나 갈까 그랬지. 그래서 한번은 내가 이제 일본을 좀 가고 싶다 청을 넣으니까 이 양반이 가지 말고 여기 있으면 자기가 성균관대학교 야간 넣어주겠다는 거야. 몇 년 있으면 바둑도 고단자가 돼 있을 거고 대학 졸업하면 한국은행에 취직도 시켜준다 그래.
그래서 일본 가는 거 포기하고 그럭저럭 지냈는데 5.16 군사쿠데타가 났네? 심계원장이고 장관이고 뭐고 다 자동케이스로 달려 들어가 버리는 그런 시국이지. 판이 바뀌어버렸어.
그러고 있는데 그 다음 후임 심계원장이 있을 거 아니여. 이원엽 씨가 나를 부른 거야. 전화가 그때는 없거든. 국가재건최고회의 천하라 육군 대위가 찾아왔어. 아이고, 나 죽었네 싶었지. 갔더니 저녁시간이라 퇴근해야 하니까 타라고 그래. 어디로 끌고 가나 바싹 쫄았는데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러더니 바둑 한판 두자 그래. 아이고 나 살았다 했지.
알고 보니 신임 심계원장으로 취임하고서 보고를 받았나봐. 전임 원장이 조상연이를 봐줬다는 얘길 듣고서 그럼 한번 데리고 와봐, 그래서 불렀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바둑 두고 하다가 친해졌어. 부인하고도 친해지고. 그러니까 나중에 뭐 원하는 게 없냐고 묻더라고.
그때 내가 나이가 좀 있었고 이재에 밝았다면 사업할래요 그랬으면 이재용 같은 재벌이 돼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야. 일본 가고 싶다고 그랬더니 일주일 만에 여권이 나오더라고. 이전 이승만 자유당정권 같았으면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깊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야. 일본바둑이 셌잖아. 가서 바둑공부를 하고 싶어서….”
김인, 조훈현, 조치훈에 앞서 출현한 ‘원조’ 바둑신동 조상연은 이렇게 62년 3월 26일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조남철 선생의 회고와는 달리 조상연 七단의 기억에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삼촌을 찾은 자취가 없다.
- 아니 근데 저는 이해가 안 가는 게, 이제 일본을 가시잖아요? 그러면 조남철 선생님이 기타니도장 출신 아닙니까. 그러면 일본에 가시기 전에 작은아버지께 저 일본에 갑니다, 뭐 그런 얘기도 안 하셨어요? 조카가 일본을 가는데, 바둑 배우겠다고 그러면은 뭐 소개장이든 뭐든 써주거나 써달라고 해서 들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63년 전 일이긴 하나…, 삼촌을 찾아간 기억이 없어. 일본 가는 데 문제될 것이 없었으니까. 지금이야 다 옛날이야기고 서로 화해했지만 그때는 숙질간이어도 사이가 썩 좋은 게 아니었어. 왜냐하면 내가 지금도 안 잊어버린 게, 내일 승단대회에서 이기면 승단이 돼. 그런데 오늘 긴급 발표가 있어. 승단에 필요한 대국수를 10판에서 12판으로 올려놨어. 하루 전에. 그때는 조남철이 법이니까. 내일 이겨도 승단을 못해. 그러니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오해를 하지. 속사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땐 젊었으니까. 혈기방장(血氣方壯)할 때니까.
갈 적에 국세청장이 소개장을 써주더라고. 이 분이 일본에 있는 자기 후배를 소개하며 거기를 우선 가봐라 그래. 그때 모아놓은 돈 3만 원을 갖고 갔어. 오사카에 갔다가 허탕치고 다시 그 양반을 찾아 고베로 갔다가 그렇게 허송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관서기원 쪽 이야기가 나오고 그럴 무렵 기타니 선생 쪽에서 연락이 온 거지. 한국에서 바둑을 좀 둔다는 친구 하나가 일본에 와 있나 본데 조남철의 조카라고 하더라, 이런 소문이 났나봐. 일본말은 하나도 모른 상태에서 도일했으니까 말귀는 알아듣지 못하겠고, 뭐 기타니 어쩌고 하는데 부른다고 하니까 일단 도쿄로 따라가게 됐지.”
▲ 우리나이 스물의 김인과 스물둘의 조상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름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이 홀연히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다. 한국바둑을 짊어질 천재 청년기사들이었다. 그런데 조상연은 막상 일본에 가 보니 자신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성하기 위해선 되도록 어린 나이에 시작해야 한다는 걸 각성하고 부모님을 설득해 여섯 살에 불과한 막내동생 치훈을 다시 데려갔다. 장남 상연이 도일한 것도 마음 아픈 노릇인데 다섯 달 만에 막내아들까지 이국으로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사진은 일본 기타니도장 유학 중에 찍은 세 사람. 김인(왼쪽)과 조상연(가은데)·치훈 형제. 이 사진은 기타니 선생이 제자들과 지방 지도기 행사를 갈 때 하네다공항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신이 조치훈을 빚기 위한 포석
- 그러면 일본에 가셨을 때는 기타니 선생한테 갈 때까지도 기타니라는 분이 누군지도 몰랐던 거예요?
“바둑을 즐겨하시던 할아버지한테 기타니라는 이름은 들었지. 그리고 제자들 많이 키운다는 것도 듣고. 그렇게 가게 되면서 기타니 문하로 들어간 거지. 도장에서 숙식하는 내제자(內弟子)로 들어간 건 아니었고 밖에 주거지를 얻어놓고 왔다갔다 하는. 입단 후 문하생이 된 다케미야(武宮正樹) 九단도 그런 제자 중 한명이었어요.
그런데 기타니도장에 가서 보니 아휴, 이게 대단한 거라. 한국에서 까분 정도의 실력으로는 갖다댈 수가 없는 수준들이야. 그냥 한국을 못 가겠어 창피해서. 또 최하영 씨 줄은 끊어졌고, 기사로서 대성하기에는 늦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치훈이 이놈을 데려와 키우자 마음먹게 된 거지. 어떤 사람이 말하길, 신이 조치훈이라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다리 역할을 한 거라고 하던데 그런 것 같긴 해요. 앞서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못 갔을 테고….”
- 이제 우리말을 막 뗀 여섯 살짜리 꼬마에요. 부모품을 떼어놓기가 간단치 않았을 텐데. 게다가 형도 고작 스물을 넘긴 나이. 일본말도 하나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에서 먹이고 씻겨가며 건사해야 할 막내동생을 데려온다는 게 어디 보통 결심인가요.
“그래서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 얘기했더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이 새끼가 장남이 간 것만 해도 분통이 터지는데 (실은 내가 바둑으로 버는 돈이 집안 밥줄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놈이 다섯 달도 안돼 여섯 살짜리 막내까지 또 데리고 간다고?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그냥 아, 이놈의 웬수 같은 새끼, 뭐 이런 분위기였어요. 처음엔.
하여간 부모님을 설득하고 치훈이를 데려오려는데 내가 비행기값이 없어. 궁리 끝에 마산에 최재형 씨한테 부탁했어요. 무학소주 들어보셨죠? 학초배 전국아마대회를 만드신. 한국기원 이사장도 역임하셨고. 그 분한테 국제전화를 해서 절대 돈은 주지 말고 비행기표, 일본행 편도편만 사주십사 간청했어. 꼭 갚을 테니 무기한 무이자로 빌려달라고. 그 분이 표를 끊어줬어. 반드시 표를 사서 달라고 조건을 단 건 돈으로 주게 되면 이게 주변어른들 손을 타 다 없어질 걸 염려한 거지.
62년 8월 1일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한 치훈이가 날 보자마자 오줌이 마렵다며 화장실부터 찾았어요. 그런데 소변 때문이 아니더라고. 제딴에는 종아리양말 속에 꼭꼭 숨겨온 지폐부터 꺼내 형에게 건네는 거야. 누군가로부터 받은 전별금이었던가 본데, 여섯 살 꼬마의 눈에도 이것만은 지켜야겠다 작심했던 듯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 1962년 8월 1일 일본 하네다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기타니 九단 부부를 비롯해 도장 선배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형 상연이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 1962년 조치훈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7월, 작은아버지 조남철 七단과 도일을 기념하는 지도기 세 판을 두었다. 꼬마 조치훈은 세 판 다 졌지만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둔 기타니 문하 100단 달성 기념대국에서는 린하이펑 六단에게 다섯 점으로 멋지게 이겨 큰 관심을 끌었다.
▲ 프로기사 김수영·수장의 아버지인 김탁(金鐸, 아마3단) 선생은 조상연뿐 아니라 조치훈을 여러모로 도와준 후원자였다. 초창기 우리 바둑계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으로서 조상연·치훈 형제에게 바둑을 가르쳤고, 정작 자기 자식인 김수영은 뒷전으로 미룰 만큼 적극 후원했다.
조치훈이 도일 직전 찍은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조남철, 그 왼쪽 옆이 김탁 선생, 그 옆이 최재형 전 한국기원 이사장이다.
- 그런데 바둑꼬마 조치훈이 일본을 간다고 해 여기저기 떠들썩했고 작은아버지 조남철 七단이랑 5점으로 도일기념 3번기를 갖기도 했어요. 그런데 여권이 늦게 나와 하마터면 62년 8월 2일 산케이홀에서 열린 ‘기타니 일문 100단 돌파 기념대회’에도 참석 못할 뻔했다면서요?
이 기념식은 일본 13개 신문사와 통신사가 후원했을 정도로 대단했는데, 오픈행사로 가장 주목받은 이벤트가 당시 20세,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신진기사 린하이펑(林海峰) 六단과 조치훈의 5점 지도기였기에 다들 가슴 졸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7월 말에 여권은 나왔어. 그런데 한국에서 애를 이런저런 행사로 데리고 다니다가 기념식 전날 8월 1일에야 간신히 도착해 좀 불안했어요. 난생 처음 부모품에서 벗어나 비행기를 타본 어린아이에요. 바로 다음날 1000명이 넘게 들어찬 큰 홀 전면 단상에서 공개대국을 두어야 하는데 혹 피곤해 졸기라도 할까봐, 주눅이 들거나 흥분해 경솔하게 둘까봐 팔짱을 끼고 둘 것을 주문했죠. 신중하게 두라고.”
▲ 일본 도착 다음날 8월 2일, 꼬마 조치훈은 시종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도쿄 산케이홀에 들어찬 1300여 명 앞에서 린하이펑 六 단과 5점 지도기를 두었다.
“여러분, 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바둑을 뒀다고 해도 아직 7년이 안 됩니다.”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꼬마 조치훈을 소개한 멘트다. 훗날 린하이펑 九단도 그때의 지도기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상대가 너무 어려서 바둑판 반대편에 손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이라 만만히 본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가 이기지 못했다. (118수 끝, 불계패) 그 나이 또래 아이로서는 정말 격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작은아버지 조남철 七단과 벌인 5점 기념대국에서 세 판 다 졌던 조치훈이었기에 린하이펑 六단이 봐주지 않았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하나, 그 바둑기보를 보면 실제 잘 둔 건 사실이다.
▲ 여섯 살 꼬마 치훈의 일본 바둑계 데뷔는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곁에서 형(조상연)과 작은아버지(조남철)가 지켜보고 있다.
당시 차세대 유망주인 린하이펑 六단을 맞아 당당한 실력을 보이자 ‘엄청난 아이가 왔다’는 평판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그때까지 10세 입단이 없었던 일본바둑으로선 기타니도장에 막 입문한 막내 제자가 이를 이룰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분위기는 꼬마 조치훈을 짓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렇지만 조치훈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11세 9개월에 입단했다. 그렇긴 했으나 이것도 당시로서는 최연소 입단기록이었다.
일본기원 최초의 ‘10세 입단’이란 대기록을 한몸에 받아내기에는 조치훈은 그때 너무 어린 꼬마였고 엄마품을 떠난 타국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 일본경제신문에 연재한 조치훈 九단의 ‘나의 이력서(私の履歷書)’나 요미우리에 연재한 ‘시대의 증언자(時代の証言者)-바둑과 살다’를 봐도 그 부담감이 어떠했는지, 어찌하여 바둑에 전념하지 않고 말썽꾸러기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1966년 여름, 관서지방을 순회하던 중, 스승님(기타니 九단)이 각별히 아꼈던 고베의 자산가 다케오카 시로(武岡四郎) 씨 댁에 묵게 되었다. 현관에 걸려 있던 큰 호랑이 그림을 내가 한참 바라보고 있자, 다케오카 씨가 “호랑이를 좋아하니?”라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케오카 씨는 흔쾌히 “그럼, 그 그림을 네게 주겠다”고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기타니 선생님은 그 일이 곤란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이 아이가 열 살에 초단이 되면 그때 부탁드리겠다”며 사양하셨다. ‘열 살에 초단’이라는 말이 선생님 입에서 처음 나온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는 일화가, 미하루 어머님(스승 기타니 선생의 부인)이 쓰신 [기타니 도장과 일흔 명의 아이들]이라는 책에 나온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었고, 압박감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아마 그 후로 미하루 어머님이 나를 꾸짖으실 때마다 그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신 덕분에 점점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자주 혼이 났다. 장난만 치는 말썽꾸러기였다. 꾸중은 한두 시간이 넘길 때도 있었고, 꽤 힘들었다. 미하루 어머님이 “치훈이는 혼자서 다른 아이들 전부만큼 손이 많이 갔다”고 하셨다는 증언도 있다. - 일본경제신문 연재 <나의 이력서(私の履歷書)’>에서.
▲ 1968년 2월 14일 11세로 입단한 조치훈. 일본바둑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으나 기타니 스승은 내심 10세 입단 기록을 기대하고 있었다.
▲ 조치훈의 기타니도장 내제자 수업 장면.
문하생시절 같은 방을 쓴 고바야시 고이치, 입단 후 조치훈 九단과 필생의 라이벌로서 숱한 타이틀전을 펼친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이 말하는 소년시절 조치훈에 대한 인상도 그랬다. 지난 9월 중국 칭다오에서 사이버오로 김수광 기자와 나눈 인터뷰 한 대목.
“제가 열두 살, 그가 여덟 살일 때 처음 만났습니다. 조치훈 九단은 그저 아이였죠. 놀고 싶을 나이잖아요. 여섯 살에 부모 곁을 떠나 일본에 왔으니 안쓰러웠습니다. 무척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열두 살에 홋카이도 시골에서 도쿄로 올라왔는데 처음엔 무척 외로웠거든요.
조치훈 九단과 나는 기타니 미노루 선생 문하에 들어갔고, 사모님인 기타니 미하루 여사가 보살펴 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미하루 여사)께 직접 들었는데, 어린이 조치훈 때문에 정말 힘드셨다고 합니다(웃음). 손이 너무 많이 간다고 하셨어요. 조치훈 한 명 돌보는 데 들어간 품이 내제자 70명 몫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셨습니다(웃음). 정말 개구쟁이였죠. 함께 놀거나 한 기억은 크게 나지 않습니다. 도장이다 보니 바둑 공부하느라….”
▲ '니가 치훈이로구나. 어서 오렴. 반갑다~' 하네다공항에서 한국에서 온 꼬마 조치훈을 첫 대면했을 때 기타니 미하루 여사가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꼬마는 생각 이상 말썽꾸러기여서 미하루 어머니는 골치가 많이 아팠다고 한다.
조치훈 九단이 요미우리신문에 연재한 '시대의 증언자(時代の証言者)-바둑과 살다'를 보면 그때의 상황에 대해 좀 더 구체으로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된 나는 신주쿠 와카마쓰초의 도쿄 한국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를 자주 빼먹었다. 요쓰야의 도장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거리였는데 마침 중간쯤에 형(조상연)이 살던 아파트가 있었다.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도장을 나서면 곧장 형의 아파트로 향하곤 했다.
형도 그 시간에는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나는 사전을 한 손에 들고 요시카와 에이지의 역사소설을 읽기도 하고, 집주인 댁에서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때까지 그렇게 혼자 시간을 때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학교 공부는 하지 않았다. 바둑 공부에도 좀처럼 마음이 붙지 않았다. 기타니도장의 너무나 높은 수준에 기가 죽어버린 나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도장 마당에서 칼싸움 놀이를 하거나 도장의 누나들에게 짓��은 장난을 치는 등 겉보기에는 마냥 활기차게 지내는 듯 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바둑 실력만큼은 일본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 거의 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열 살까지는 프로 초단이 되겠다’는 목표가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여덟 살 때도, 아홉 살 때도, 그리고 열 살이 되어서도 입단대회의 예선조차 통과할 수 없었다.
1965년에 도장에 온 네 살 위의 고바야시 고이치 명예기성은 “처음 왔을 때 치훈이 더 강해서 충격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정작 나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워낙 공부에 열심이었던 그였으니, 분명 금세 나를 앞질러 갔을 것이다. 실제로 고이치 씨는 나보다 1년 먼저 프로가 되었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이대로는 안 되니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미하루 여사님께 불려갔던 형이 돌아와서 “이번에도 입단하지 못하면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했고, 그제야 나는 ‘죽을 각오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계속>
▲ 기타니도장의 수업 한때. 오른쪽 줄 뒤편 기타니 부부와 전면 끝에 도장막내 조치훈, 기타니 선생의 3녀 레이코(六단, 후일 고바야 시 고이치와 결혼)가 보인다.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쟁쟁한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음을 아실 테다. 조치훈을 비롯하여 고바야시 고이치, 다케미야, 이시다, 가토 등이 보인다. 누군지 알아보신다면 대단한 바둑애호가시다.
여섯 살 동생을 일본으로 데려가는 과정과 천재 소년의 이면에 있던 고뇌를 형 조상연의 목소리로 담았다. 다음 편에서는 동생의 그늘에 가려졌던 형의 삶, 특히 한국기원에서 두 번이나 제명당한 사연과 후학 양성이라는 마지막 꿈에 관해 마저 다룬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