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전날에야 받은 '불허 통보', "친선경기" 항변 안 통했다

프로배구 경기장면(사진=KOVO)
[스포츠춘추]
2025 여수·NH농협컵이 개막 당일 파행을 맞았다. 국제배구연맹(FIVB)의 제동으로 남자부 경기가 첫 경기만 치르고 돌연 중단됐고, 남은 일정이 아예 취소될 위기에 내몰렸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13일 전남 여수 진남체육관에서 현대캐피탈과 OK저축은행의 제1경기를 마친 뒤 대회를 급작스럽게 중단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열릴 예정이던 삼성화재와 KB손해보험의 제2경기는 14일 오전 11시로 연기됐다. 13일 자정까지 FIVB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하면 남자부 컵대회 전면 취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사태의 원인은 KOVO의 안이한 인식에 있다. 원래 국제대회 기간에는 국내리그를 포함해 어떤 다른 대회도 개최할 수 없다는 게 FIVB의 철칙이다. 한 배구 관계자는 "배구계는 전통적으로 국제대회가 중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KOVO는 그간 컵대회를 '친선대회'라고 포장하며 국제대회 기간에도 진행해왔다. 국제대회 기간에는 국제이적동의서(ITC) 발급이 불가능한 외국인 선수 없이 국내선수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국제대회가 없었던 지난해엔 4년 만에 외국인 선수가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렀다. 이에 올해는 아예 대회 전에 FIVB에 외국인선수 출전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대회 기간이 세계선수권과 겹치는 상황에서 대회를 개최하고 외국인 선수 출전 승인까지 요구하는 것은 국제연맹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KOVO는 FIVB로부터 공식 답변을 받지 못한 상태로 대회 준비를 강행했다. 그러다 대회 전날에서야 연맹 답변이 왔다. 외국인 선수 참가 불허는 물론 대회 개최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결국 KOVO는 대회 직전 각 구단에 외국인 선수 참가 불가를 통보했다. 외국인 선수 없이 일단 첫 경기를 진행했지만, 두 번째 경기를 앞두고 대회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
배구계에서는 예견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KOVO가 구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대회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리그 외국인 감독들과 구단에서는 처음부터 이번 대회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KOVO는 "문제없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배구 관계자는 "국제 규정을 아는 외국인 감독들 입장에서는 대회 강행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처음부터 경기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연맹에 수십 차례 각 구단마다 문의했는데 '문제 없다, 괜찮다'는 답만 되풀이했다"고 전했다.

한국배구연맹은 24일 오후 2시 여수시와 '2025 여수·KOVO컵 프로배구대회' 유치 협약을 체결했다(사진=KOVO)
FIVB가 이번에 유독 강경하게 나선 것은 한국 남자 선수들의 세계선수권 참가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계자는 "FIVB는 한국이 자국 선수도 출전한 국제대회가 진행 중인데, 대놓고 규정을 어기는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동안 문제삼지 않았던 대회 자체를 문제삼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상금과 스폰서, 중계방송까지 있는 대회가 단순한 친선경기라는 항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FIVB의 불가 결정에도 대회를 강행하면 KOVO와 구단에는 벌금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에겐 출전 정지 징계가 내려질 수 있다. KOVO가 뒤늦게 대회 중단과 취소까지 거론하는 배경이다.
이날 남자부 경기가 열린 체육관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2경기를 기다리던 관중들은 장내 아나운서의 대회 중단 안내를 듣고 실망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배구 관계자는 "첫 경기와 두 번째 경기 티켓을 따로 판매한 바람에, 두 번째 경기 티켓을 구매한 관중은 허탕을 친 셈이 됐다. 크게 항의하면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며 "직원이 나와서 안내해야 할 상황인데 아무도 없어서 더 혼란스러웠다"고 전했다.
KOVO의 황당하고 안이한 일처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KOVO는 앞서 새 시즌 V리그 개막전을 당초 10월 18일로 잡았다가 FIVB 권고로 내년 3월 19일로 급하게 변경한 바 있다. 세계선수권 종료 후 3주가 지나는 10월 20일 이후부터 V리그 진행이 가능한데도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디펜딩 챔피언 현대캐피탈은 우승팀 특전인 개막전 경기가 한참 뒤로 미뤄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같은 사태를 한번 겪었으면 충분히 이번 사태 역시 예견할 만했고 경고도 수차례 나왔는데도 강행하다 국제 망신을 당한 것이다. KOVO는 아시아 배구연맹(AVC)을 통해 FIVB를 설득하는 중이다. 13일 자정까지 승인을 받지 못하면 남자부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판이다.
KOVO 관계자는 "FIVB와의 시각 차이로 인해 물의를 일으켜 구단 관계자 및 선수단, 여수시 관계자 및 여러 스폰서, 그리고 여수 시민을 비롯한 배구 팬분들께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배구계에선 '시각 차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한다.
한 배구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실수라든지 이전에도 해왔는데 이번에만 문제 삼는다는 식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며 "만에 하나 승인이 나와서 대회가 정상적으로 치러지게 되더라도, KOVO의 일처리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비판했다.
당장 대회가 취소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팀과 선수들에게 돌아간다. 시즌 전 전력 점검 기회를 잃는 것은 물론, 대회를 준비한 여수시와 스폰서들에게도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21일부터 열리는 여자부 경기는 정상 개최될 예정이지만, 남자부가 취소되면 반쪽 대회가 된다. 한국 배구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부끄러운 일임에는 변함없다.